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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들의 공동체 The community of sinners

글쓴이 : 에드몬톤 안디옥 교회 날짜 : 2018-09-16 (일) 15:44 조회 : 14
설교일 : 9월 16일
설교자 : 한흥렬 목사
본문말씀 : 마 Mt 9:9-13

죄인들의 공동체 The community of sinners

마태 Mat 9: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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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에 갑자기 내린 눈, 당혹스러웠지만,

손님입니다. 잠시 머물다 갈...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속에 예고 없이 찾아온 어려움들 때문에 힘드시죠?

삶속의 고난도 문제도 손님처럼 잠시만 머물다 갔으면 좋겠습니다.

서로 격려합니다. “손님입니다.

 

1.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 예수님

본문의 주인공은 마태입니다. 마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세금을 거두어 로마에 바치는 세리였기에 저들의 눈에는 나라와 백성들의 피를 팔아 로마에 아부하는 매국노요, 죄인이었습니다. 죄책감에 눌려있던 그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너무 기뻐 마태는 자기 동료들을 초대해서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불청객이 찾아옵니다.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의롭고 거룩하다고 여겼기에 왜 예수님이 더러운 죄인들과 어울리는지 따져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11절하)

 

그때에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대답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12-13)

 

실제 그렇습니다. 병원에는 병든 자만 갑니다. 의사는 병든 자를 위하여 필요합니다. 우리 인간들이 잘 살고 있었다면 굳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 병들고 죽어가고 있기에 그들을 살리려 의사이신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2. 죄인들의 공동체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올 수 있는 것도 바로 이점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의로움과 능력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부족합니까? 스스로 죄에 고통에 짓눌려 있습니까? 나는 병들고 부족한 인생이라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충분히 자격이 있습니다. 교회는 이처럼 죄인들과 병자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이 교회에 가자고 하니까 죄가 많아서 못가겠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주님 앞에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목욕탕에 가는 이유는 몸이 더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몸을 씻기 위해서 입니다. 죄가 많아 교회에 못가겠다는 말은 더러워서 목욕탕에 못가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교회는 성자들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깨끗하지 못하다고 비난합니다. 당연합니다. 교회는 병원입니다. 병원에는 환자가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건강한 사람을 병원에서 찾아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실상 인간은 모두 죄인이요 병든 자들입니다. 세상에는 죄인과 의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죄인이라 인정하는 죄인과, 죄인이면서도 인정하지 않는 죄인이 있을 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도덕적으로 좀 바른 사람, 착한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기가 더 힘이 듭니다. 환자가 자기가 병이 들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치료를 할 수 있는데 스스로 건강하다 생각하여 병원에 가지 않으니 도무지 치료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실상 자기 의에 사로잡힌 사람들입니다. 자기 의란 것은 자기 기준이 강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기준을 정해놓고 스스로 만족해하는 사람이요, 그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혐오하는 사람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렇습니다.


3. 변화 공동체

따라서 교회는 바리새인화 되면 안됩니다. 바리새인화 된 교회공동체, 힘을 가진 자들의 공동체, 의인화된 공동체가 되면 안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죄인들을 멀리했지만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죄인들이 갈 수 없는 교회가 되어가고 있는 듯 합니다. 교회의 문턱이 너무 높아졌습니다. 교회는 가난한자들의 공동체, 약한자들의 공동체, 소외된 자들의 공동체여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있고, 연약한 사람들을 서로 용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그러한 사람들이 찾아와 새롭게 되는 변화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어떤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그 손님은 차림이 형편없어 보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누구도 그를 상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피해가 될까 옆자리에 앉지도 않았습니다. 교인들은 저마다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잠시 머물다 가겠지.’ 예, 그 사람은 그냥 손님이 아니라 불청객이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설교시간 자꾸 그 불청객에게 눈길이 갔습니다. 예배가 마치고 안내위원들에게 그 사람이 어디 갔느냐고 물었습니다. 누구냐고 물었죠. 위원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습니다. “목사님이 그 사람을 모르세요. 예수라는 사람이잖아요.

 

너무 놀라 꿈에서 깼다. 회개의 눈물이 쏟아졌다.

 

그 불청객이 묻습니다.

“오늘 너에게, 너에 가정에, 너희 교회에 내가 들어가도 되겠니?

 

4. 긍휼 공동체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에게 없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이 문제를 우리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13절상)

 

그들이 잃어버린 것은 바로 하나님의 긍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 용서, 사랑, 은혜 말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와 정의의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 진리의 잣대를 들이 대었다면 이스라엘은 벌써 망했을 것이요, 그 앞에 설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진리를 감싸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입니다. 긍휼은 히브리어로 ‘라함’입니다. 이는 자궁이라는 ‘레헴’과 같은 어원입니다. 뱃속에 아이를 잉태하고 있는 어미의 마음이 긍휼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마치 자기 자궁 안에 품고 있는 아이를 보듯 그렇게 보셨습니다. 영어로 긍휼은 compassion입니다. 이는 함께 한다는 com 과 고난 아픔을 의미하는 passion의 합성어입니다. 긍휼은 함께 아파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바로 이 긍휼의 마음입니다. 긍휼은 단지 다른 사람을 돕는 봉사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보다 더 근원적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마치 자기 뱃속의 아이처럼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날카로운 잣대보다는 이해의 마음으로 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서로에 대해서 얼마나 관용하지 못하는 사회가 되었습니까? 찬바람이 쌩쌩 부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분노하고 폭력적이며, 서로 고립되어 자살을 권장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긍휼의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합니다.

 

조안 C 존스는 <가이드포스트>에서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전합니다.

“간호학교에 입학한지 두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교수님은 수업시간에 강의 대신 간단한 문제지가 수록된 시험지를 돌렸다. 나는 수업을 착실하게 들었던 터라 별로 어렵지 않게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문제를 보고는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 문제는 ‘우리 학교를 깨끗하게 청소해주는 아주머니 이름이 무엇이냐?는 거였다. 검정 머리에 키가 크고 나이는 오십대쯤 되어 보이는 그 아주머니를 여러 번 본 적은 있으나 이름이 뭔지 알 리가 없었다. ‘이런 걸 시험 문제라고 냈나? 설마 점수에 반영하진 않겠지.’ 마지막 문제 때문에 답안 하나를 작성하지 못했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교수님, 마지막 문제도 점수에 반영되나요?’ 답안지를 제출한 뒤 나는 손을 번쩍 들어 장난스럽게 물었다. ‘물론입니다.’ 그러자 교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여러분은 간호사로서 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대하게 될 겁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여러분의 각별한 주의와 배려를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설사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이 미소를 보내며 인사를 건네는 것이 전부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지금도 나는 그 수업을 절대로 잊지 않고 있다. 청소부 아주머니의 이름이 도로시였다는 것도.

 

병원에서는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니라 단지 차트로 구분될 뿐입니다. 몇 호 환자, 어떤 암 환자, 진기한 케이스! 아닙니다. 그 한 사람은 자기 이름을 가진 소중한 한 사람이요, 한 여자의 남편이며, 아이들의 아버지요, 그를 사랑하는 부모의 존귀한 자녀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을 상대하고 물질중심의 사회를 살다보니 한 사람의 소중함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는 죄인이요 병자이기 전에 소중한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는 분입니다. 우리가 심한 죄인이고 많은 고통을 겪고 있고 더 무력한 병자일수록 더욱 더 그러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긍휼의 마음이 사람을 살립니다. 죄인을 품으면 그들이 의인이 됩니다. 병든 자를 품으면 그들이 건강한 사람이 됩니다. 마태는 세리입니다. 그는 돈만 알았던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바뀌었습니다. 결국은 배타적인 유대인들을 위해서 마태복음서를 기록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긍휼의 힘입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이 바로 긍휼의 마음입니다.

 

 

5. 열린 공동체

죄인들의 공동체,

변화 공동체,

긍휼 공동체는,

그래서 누구라도 서로 함께 할 수 있는 열린 공동체입니다.

 

주님은

나 같은 죄인을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를

이곳으로 부르셨습니다.

 

 

< 찬 양 >

주의 도를 버리고

 

주의 도를 버리고 헛된 꿈을 쫓던 우리들

거짓과 교만한 마음을 용서하여 주소서

하나님의 긍휼로 부끄러운 우리 삶을 덮어주소서

우리의 소망 우리의 구원 주께 간구합니다

 

//: 성령의 불로 나의 맘을 태워 주소서

성령의 불로 나의 영혼 새롭게 하소서

 

심한 고난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죽음과 같은 고통에서 주를 보게 하셨네

용서 받을 수 없는 나를 위해 십자가 달리셨으니

주 사랑에서 어느 누구도 끊을 수는 없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