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게시물 414건, 최근 0 건

38년 된 병자 A 38 year old invalid

글쓴이 : 에드몬톤 안디옥 교회 날짜 : 2019-03-10 (일) 10:41 조회 : 1374
설교일 : 3월 10일
설교자 : 한흥렬 목사
본문말씀 : 요 Jn 5:1-10

38년된 병자 A 38 year old invalid

요한 Jn 5:1-10

=====================================================================================

38년된 병자의 치유 속에 숨어있는 신앙의 진리들을 발견해 봅시다!


1. 양문 베데스다

2절 말씀에 의하면 본문은 예루살렘 양문 곁 베데스다라는 연못가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루살렘 동쪽엔 실로암 샘으로 가는 샘문이 있었고, 서쪽엔 망대문이 있었고, 남쪽엔 배설물을 버리는 분()문이 있었고, 오늘 본문 북쪽에 바로 성전에 이르기 전 제사를 위해 양을 사고파는 양문이 있었습니다.

 

‘양문’은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할 때 가장 먼저 수축했던 문이지요! 무너진 나라, 무너진 백성, 무너진 신앙을 세우기 위해서는 제사 즉 예배가 회복되어야 한다고 느헤미야는 믿었던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를 양문으로 초대합니다. 여러분의 무엇이 무너졌습니까? 양문이 수축되시길 바랍니다. 예배의 회복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예배를 경홀히 여깁니다. 예배 즉 양문을 무너뜨립니다. 아닙니다. 양문이 수축되고 예배에 성공해야 합니다.

 

바로 그 곳 양문 곁에 ‘베데스다’ 연못이 있었습니다. 여기 “벧”이란 집이란 뜻이고 “에스다”란 은혜, 자비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 은혜의 집이라는 뜻이지요. 베데스다에는 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고침을 받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에 나온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 은혜 받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바쁜 일상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의 집에 앉아있습니다.

 

 

2. 천사가 내려와 휘저을 때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고침 받는다는 전설

베데스다에는 내려오는 전설이 하나 있었습니다. 전설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오늘 본문 구절이 가로로 표시가 되어있듯이, 이 구절은 후대에 교부들이 베데스다에 왜 병자들이 모여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내려오던 이야기를 추가했다고 봅니다. 세상속에는 전해져 내려오는 일종의 전설들이 있습니다. 민속신앙들 속에도 이러한 확인되지 않은 막연한 전설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의 신앙은 전설에 기초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누군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역사속에 실제하고, 현존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은 전설을 담아놓은 책이 아닙니다. 역사속에 실제로 일어났던, 그리고 지금도 일하고 계신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병자를 도와 베데스다 연못으로 안내하지도 않았고, 그 물속에 집어넣지도 않았습니다. 말씀으로 고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우리도 모르게 세속적인 것이 나의 신앙속에 들어와 있지는 않습니까?

 

이 전설속에 더 큰 문제는 누구나 고침을 받는 것이 아니라 물이 요동할 때 먼저 1등으로 들어가야만 기회가 찾아온다는 신념입니다. 세상의 생존방식은 경쟁을 해야만 합니다. 경쟁에서 뒤처지거나 지면 불이익이 찾아오고, 결국 살수가 없게 됩니다. 이러한 생존방식이 종교들에게 영향을 줍니다. ‘그래도 고침 받으려면 조건적 행위가 충족되어야 한다’는 오해를 낳았습니다.‘당신은 구원받으셨습니까?’라고 물어보면 어떤 사람은 ‘글쎄요? 내가 아직 주님을 위해서 뭐라도 더 해야 되는데, 그러질 못해서 아직입니다.2% 부족한 구원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지난주에 수요 TEE 성서대학 첫시간을 가졌습니다. 거듭남에 대해서 배우고 나누었습니다. 교재의 내용중에 보면 ‘나는 교회에 다니니까, 나는 모태신앙이니까, 나는 세례를 받았으니까 거듭났겠지?’하는 만화가 나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결코 아닙니다. 요한1:12-13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예수님을 그리스도, 즉 구원자로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구원에는 다른 아무런 조건이 붙지 않습니다.

 


3.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고침을 받을 수 없다는 병자를 고쳐주신 예수님

예수님은 어떤 조건없이 병을 고쳐주십니다. 이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말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 받습니다. 10절에 보시면 바리새인은 황당한 트집을 잡습니다. ‘안식일에 자리들고 걸어감이 불법’이라는 것입니다. 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는 다면 아무도 구원받을 사람이 없습니다. 착하게 살아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면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누구도 완벽한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자비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언제나 기다리고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찾아가 만나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명절날 축제 속에서도 희희낙낙 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이 축제와는 거리가 먼 곳에 절망과 한숨을 끌어안고 신음하는 그늘진 장소가 있음을 잊지 않고 저들을 찾아오셨습니다. 다리 저는 사람, 맹인, 혈기 마른 신체 불구자, 가난에 지쳐 야윈 무리들이 있는 곳, 세상에서 버린바 된 그곳, 중환자들의 거처를 찾아 가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죄악 가운데 빠져있는 소망없는 세상에 주님이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이 시간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인생의 실패, 고난과 아픔을 안고 오신 분이 있습니까? 마음의 고통과 상처를 안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몸과 마음 - 삶이 아프신 분이 계십니까? 오늘 이 시간 우리 주님이 당신을 만나 주실 것입니다.

 

 

4. , 예수님이 물어보신 것은 네가 낫고자하느냐는 너무나 당연한 질문

이 얼마나 엉뚱한 질문입니까? 당연히 문제에서 벗어나길 원하죠. 그런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당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교회 나오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을 원치 않는 사람들, 사는게 원래 그런거지 뭐, 비정상적인 상태가 정상이 되어버린, 남들이 알면 어떻게 생각하겠어. 창피해... 38년 된 병자에게 예수님이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셨을까요? 어쩌면 그는 이미 자신의 문제를 체념해 버렸기 때문은 아닐까요? 38년 된 병자가 어쩌면 나의 모습은 아닌지요?

 

처음에는 넣어줄 사람이 없다고 원망했는데, 지금은 낫고자 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병자에게 필요한 것은 원망이 아니라 소망입니다. 원망이 소망으로 바뀔 때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찾아오신 예수님께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소망이 적다는 것은 믿음이 적다는 것과 같은 말이기도 합니다. 주님께 소망을 두고, 구원을 간절히 열망하십시오.

 

“주님 내가 낫고자 원합니다. 주님께 손 내미시기 바랍니다.

 

 

기독교는 물에 들어가기 위해 아귀다툼을 하고 싸우는 행위의 종교가 아닙니다.

안식일을 지켜야만 하는 율법적 종교도 아닙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소망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은혜와 생명의 종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