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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신앙4 신앙과 지성 Faith and intelligence

글쓴이 : 에드몬톤 안디옥 교회 날짜 : 2019-12-08 (일) 08:04 조회 : 35
설교일 : 12월 8일
설교자 : 한흥렬 목사
본문말씀 : 눅 Lk 24:44-49

바른신앙 시리즈

4. 신앙과 지성 Faith and intelligence

Lk 24:4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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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자주 듣던 말은 “따지지 말고 믿어라, 신앙은 무조건 믿는 것이다. 일단 믿고 순종하다 보면 저절로 이해가 된다, 복잡하게 믿지 말고 단순하게 믿어라”라는 말입니다. 오늘날 강단에서도 설교자들은 여전히 무조건적인 믿음과 절대 순종만을 강조하고, 성도들은 크게 아멘하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잘 믿기만 하면, 신앙생활 잘하는 것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회의하거나 의심하거나 질문하는 것은 마치 믿음이 없는 것처럼 여기지기 때문에, 믿어지지 않아도 이해되지 않아도, 그것에 대해 고민하거나 생각하지 않고, 그냥 덮어놓고 믿으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리고 이해하지 않고 믿어지지 않는 신앙적인 고민이나 간격들을 소위 말하는 체험 신앙으로 해결해 나가려고 합니다. 머리로 이해하면 안 되고, 성령을 받고, 성령을 체험하면 저절로 다 믿어지고 이해된다는 식의 논리입니다. 이런 현상을 ‘반지성주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반지성주의는 과연 성경적인 것일까요?

 

 

1. 교회 안에는 굉장히 뿌리 깊은 반지성주의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처럼 교회 안에 반이성적, 반지성적 분위기가 팽배한 데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첫째로, 부흥 운동과 부흥 집회의 영향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부흥집회를 통해, 하나님은 머리로 만나는 것이 아니고 가슴으로 만나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습니다. 일반적으로 부흥운동은 음악 즉 찬양을 많이 강조하고, 감성을 자극하는 언어들과 수많은 감동적인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또한, 감정적으로 흥분되고 격한 상태에 이르게 하는 극적인 분위기들을 만들어가기 때문에, 그런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평소에 하지 못하는 새로운 결단과 헌신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경험을 하면서 많은 성도들은 하나님을 만나고 성령을 체험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부흥운동에 영향을 받은 교회들은 성도들을 지성적으로 변화시키고, 인격적으로 변화시키는 일 보다는, 매주 뜨겁고 열광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서 감성적인 체험에 근거한 변화만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부흥회의 뜨거움과 수많은 결단들이 채 몇 주도 지나지 않아,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오는 것을 수없이 경험했습니다. 그때 그 집회에서 엄청난 결단을 하고 새 사람이 되기로 작정했는데,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다시 옛사람으로 돌아오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둘째로, 오순절 성령운동의 영향 때문입니다. 오순절주의 성령운동이나 이에 영향을 받은 많은 은사집회의 특징은, 특이하고 신비한 체험 자체를 모두 다 성령의 경험이라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령을 받기만 하면, 병도 고치고, 가난도 물리치고, 자녀들의 일도 잘 풀리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오순절 교회에서는 아직도 성령 받고 방언 받는 것을 가장 중요한 신앙의 목표로 여기고 있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는 말과 언어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하고, 알아듣지도 깨닫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방언이 최고의 은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순절 교회나 순복음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그러한 교리를 무조건 인정하지 않지만, 교단과 교파를 초월해서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아직도 이러한 오순절식 성령이해에 깊이 물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은 어떤 신비한 체험과 능력을 주는 영이기에 앞서, 진리의 영입니다. 16:13-14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성령은 지정의를 갖추신 매우 인격적인 하나님이시고, 이 세상의 모든 지혜와 지식의 근원이신 진리의 영이십니다. 따라서 성령은 인간의 이성이나 지식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지성과 이성을 참된 진리로 이끌어주시는 영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로, 영성과 지성을 대립적인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오순절 성령운동이 강하게 일어나고 있을 때 교회 안에는 성령에 대한 관심이 높았고, 소위 성령을 받기 위한 노력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성령에 대한 열풍이 약해지면서, 요즘은 그 자리를 영성이라는 새로운 운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영성운동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명상과 관상, 영성수행법은 그 나름대로 충분한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합리적이고 지성적 차원에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그것과 반대되는 영적, 신비적 차원에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지성은 뭔가 저급하고 차원이 낮은 것으로, 영성은 차원이 높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지성과 영성은 반대되는 개념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영성은 지성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올바른 영성 역시 그 중심에는 반드시 신학적 지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정리하면, 그 동안 교회는 부흥운동, 성령운동, 영성운동 등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이성과 지성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고, 신앙생활은 머리가 아닌 가슴과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는 오해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 신앙생활에서 지성과 감성과 의지의 균형보다는, 감정이 차지하는 자리와 그 영향력이 굉장히 클 때가 많습니다.

 

 

2.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지정의를 갖추신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을 가장 닮은 탁월함은 인간에게 이성을 주신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은 지, , 의 능력을 말합니다. 지각하고 인식하며 사유하는 지성과, 인지한 대상에 대해 반응하고 느끼는 감정, 그리고 그에 따르는 결과를 실제로 나타내기 위해 자발적으로 무언가를 선택하고 행동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에게 당신에게 속한 이러한 고유한 기능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피조 세계를 통틀어 오직 인간에게만 있는 존귀한 특징입니다. 자기 존재의 의미를 사색하고 사유하는 동물이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인간만이 받은 지정의는 모두 타락하고 맙니다. 죄에 사로잡힌 지성은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학문 체계를 세워가는 도구가 되고 말았습니다. 감성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몰아내고 자신만의 쾌락과 기쁨에 끌리게 되었습니다. 의지 또한 선한 일을 하지 않고 불의를 일삼도록 만들었습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것입니다.그래서 완전히 절망적인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이 오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지정의를 가진 인간은 스스로 구원을 받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인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시 회복됩니다. 타락한 지성과 감성과 의지속에 다시 희망과 소망이 흐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구속받아 새롭게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지정의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은 진리되신 당신을 더 알아가도록 이끄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에게 다가오실 때도, 지성적 차원, 감정적 차원, 의지적 차원을 통로로 해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오늘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낙심하여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먼저 본문 27에 보면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엠마오 제자들의 이성과 지성을 통로로 사용해서 그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인간의 말로 성경을 자세히 풀어주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무엇보다 먼저 인간의 지성, 이성적인 활동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신앙을 비이성적이며 맹목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또한, 생각하지 않고, 따지지 않고, 무조건 덮어 놓고 믿는 맹신적인 신앙이 좋은 것이고, 무엇을 이치적으로 따져서 논리적으로 믿는 것은, 신앙이 부족한 행위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급한 미신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우리가 성경인 경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생각하고, 추리하고, 분석하고 논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먼저 변화되는 것이 바로 지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해되지도 않고, 깨달아지지도 않는 사실을 무조건 믿으라고 강요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의 지성을 설득하시고, 우리의 이해를 깨우치시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그 후에 우리의 감정이 설득 당하게 하시고, 우리의 의지로 하여금 행동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32에 보면,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지성을 통로로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풀어 줄 때, 그들의 감정이 설득당해서 뜨거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48에서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는 말씀대로, 이후로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의 지성을 깨우쳐 설득하시고, 그 다음에 우리의 감정과 마음을 감동케 하시며, 마지막으로 우리의 의지로 하여금 행동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신앙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앎과 동의와 신뢰”가 신앙의 삼대 요소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삶의 주인이라는 것을 지성으로 깨달아 알고, 그분이 나의 주되심을 동의하는 마음으로 믿어 입술로 고백하고, 그분께 나의 삶과 죽음과 나의모든 것을 맡기고 의탁해서, 내가 살아있는 동안 그분을 따라 살아가겠다는 의지적인 다짐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에는 지성과 감정과 의지가 모두 개입되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단지 머리로 이해하는 지적인 동의만 아니고, 입술의 고백만이 아니고, 마음과 가슴의 감동만이 아니라, 우리의 머리와 가슴과 손발이 모두 개입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 도 전 >

사랑하는 여러분, 그동안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감정적인 영역, 감성적인 영역에 극단적으로 치우쳐 있었습니다. 그래서 집회와 모임 때마다 열정적으로 기도하고, 눈물 흘려 찬송을 부르고, 목이 쉬도록 부르짖건만, 예배당을 나와서는 아무런 삶의 변화와 돌이킴이 없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감정에 복받쳐서 눈물 흘리고 그것으로 은혜 받았다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소리 질러 기도하니 답답한 마음이 풀리고 속이 후련해지니, 이제 하나님이 마음의 평안을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성의 변화와 마음의 감동, 의지적인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예배나 집회는 아무런 삶의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감정의 분출, 카타르시스로 끝날 뿐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여전히 예배 따로 삶 따로, 일상 따로 신앙 따로의, 무서운 이중적인 삶을 살아가고, 그 결과 교회는 최소한의 상식도 통하지 않는 맹목적이고 반지성적인 집단으로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정의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우리가 가진 지정의를 균형있게 추구하는 바른 신앙인이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