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게시물 416건, 최근 0 건

환대5 환대의 식탁

글쓴이 : 에드몬톤 안디옥 교회 날짜 : 2020-08-09 (일) 02:01 조회 : 987
설교일 : 8월 9일
설교자 : 한흥렬 목사
본문말씀 : 눅 Lk 14:12-14

환대시리즈 Hospitality 5

환대의 식탁 Hospitality Table

Lk 14:12-14

=================================================================================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환대가 복음이다’ 지난번에 이어 ‘환대시리즈’마지막으로 ‘환대의 실천’에 대한 말씀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동물들은 같은 부류들과만 산다고 합니다. 동물들은 다른 부류들과 함께 어울려 서로를 배려하면서 살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삶과 신앙이 동물원 수준은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수준은 어떠해야 할까요?

 

 

1. 열린 환대의 식탁

예수님은 본문에서 잔치자리에 누구를 초대할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고, 가난한 자들과 병자들과 맹인들을 초청하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식탁에서 함께 식사하는 사람들과는 정반대로 거리감이 있는 사람들이죠? 예수님은 왜 이렇게 하라고 하셨습니까? ‘그 사람들이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그들이 값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우리는 누구와 먹고 나눕니까? 가깝고 친한 사람들이죠. 나 한번 사고 너 한번 사고,

이번에는 내가, 다음번에는 네가 .... 이것은 환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환대는 ‘갚음 받지 못하는 베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대신 갚아 주시는 것이죠.

 

대가를 바라지 않고 은혜를 베푸는 자들이 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은혜를 베풀면 하나님께서 갚아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적인 계산을 앞세워 선을 베풀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한 아이가 사탕 가게의 윈도우 앞에서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습니다. 가게 안에는 아주 달콤하게 보이는 초콜릿 과자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가게 주인은 소년이 오랫동안 초콜렛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았지만 못 본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사탕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고서는 소년을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습니다. 그러자 이 소년은 머뭇거림이 없이 즉시 가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가게 주인은 가장 맛있는 초콜릿으로 가득 찬 유리병 뚜껑을 열고서 공짜로 한 주먹만큼 가지고 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그의 손을 유리병 안에 넣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가게주인이 여러 차례 말을 했지만 여전히 가만히 보기만 하고 사탕을 가지고 가지 않았습니다. 가게주인이 한 움큼의 사탕을 소년에게 건네주자 얼른 사탕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가게주인이 물었습니다. “왜 네가 직접 가져가지 않고 내가 줄때에 받았니? 그러자 소년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저씨 손이 제 손보다 훨씬 더 크기 때문이에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우리 손보다 더 큽니다. 우리가 작은 은혜를 베풀면 넘치는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끼리끼리 먹고 마시는 수준, 동물원 수준을 넘어서야 합니다.

 

여자남자가 연애 할 때 보면 ‘너 한입, 나 한입.’ 옆 친구 있는데도 그러면 ‘꼴불견이라 그러죠?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초대해서 함께 식탁의 교제를 나누는 것(열린환대의 식탁)이야 말로, 진정한 환대의 복음을 실천하는 제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2. 공동식사 : 교회 친교의 참 의미

이런 의미로 매주일 예배를 마치면 우리는 공동식사를 하는 것입니다. 아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 까지 초신자든 오랜 신자든, 건강하든 그렇지 않든, 누구나 다함께, 열린 환대의 식탁에 초대되어 예수님의 사랑을 떠올리며 서로를 환대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생각하기를 ‘요즘 못 먹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주일 친교는 음식만의 문제가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요즘 코로나 때문에 예배로 모이기도 힘들지만, 음식친교는 더욱 어려워졌지요. 코로나 이후 어떻게 변하게 될지 알 수 없지만, 걱정스러운 것이 참 많고, 안타까운 것들이 참 많습니다. 음식을 나누든, 물질을 나누든, 서로 함께 나눈다는 것은 참 의미가 있는 일들이죠. .서양 문화를 막론하고 차를 한잔 마시거나, 식사를 하면 친밀감이 생기고, 특별한 관계가 맺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격려가 되고, 위로가 되지 않나요?

 

 

3. 칠병이어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친히 많은 사람들을 먹이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오병이어 사건이죠(6:38). 그러나 오병이어의 기적은 한번이 아니었습니다. 또 한번의 기적을 우리는 칠병이어라고 부릅니다(8:6). 오병이어는 들어봤는데 칠병이어도 있나요? 보리떡 7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지고 4천명을 먹이신 사건이라 칠병이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칠병이어를 오병이어의 카피(copy), 모조 사건으로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병이어와 칠병이어는 전혀 다른 사건입니다.

 

이 두 사건은 어떻게 다른가? 우선 기적에 사용된 떡의 양이 다릅니다. 오병이어는 떡 5, 칠병이어는 떡 7, 그리고 물고기 2마리는 같습니다. 그리고 떡을 먹은 무리의 수가 다릅니다. 오병이어는 5천명이 먹고, 칠병이어는 4천명이 먹었습니다. 먹고 남은 양도 다릅니다. 오병이어는 12바구니가 남았고, 칠병이어는 7광주리가 남았습니다.

 

8:19-20 내가 떡 다섯 개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 일곱 개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

 

또한 시기가 다릅니다. 오병이어는 푸른 초장에 앉히신 봄철에, 칠병이어는 마른 땅에 앉히신 여름철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러나 두 이적 사이의 결정적 차이, 장소가 다릅니다. 오병이어는 예수님께서 주로 활동하신 갈릴리 호수 서편에서 ‘유대인들을 위해서 베푼 기적’입니다. 반면에 칠병이어는 갈릴리 호수 동편에서 ‘이방인들을 위해서 베푼 기적’입니다.

 

예수님은 칠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낯선 이방인들도 먹이시고 입히시는 환대의 복음, 열린 환대의 식탁을 보이시고, 실천하셨던 것입니다.

 

 

4.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교인 수 1만 명이 넘는 미국의 한 대형교회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입니다. 국내 한 일간지에도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국민일보 2013.7.29. "노숙인이 된 목사"). 주일 아침 이 큰 교회의 주변을 노숙자 한 사람이 어슬렁거렸습니다. 허름한 행색의 이 노숙자는 교회로 향하는 교인들에게 "배가 고프니 잔돈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예배 시간이 되자 노숙자는 교회당 맨 앞자리에 앉았습니다. 곧바로 예배위원들이 달려와 제지하였고 그는 교인들의 차가운 시선을 받으며 맨 뒷자리로 밀려났습니다.

 

광고시간이 되었습니다. 인도자가 "오늘 우리 교회에 새로 부임하시는 예레미야 스티펙 목사님을 소개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교인들은 모두 기대에 찬 시선으로 새로 부임하는 목사를 찾아 일제히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런데 그 때 맨 뒷자리의 앉아 있던 바로 그 노숙자가 강단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가 이날부터 이 교회에 새로 부임하게 된 담임목사였습니다.

 

그는 노숙인 차림 그대로 강단 위로 올라갔고 곧장 마태복음 25 31절부터 40까지를 읽어 내려갔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 여기 내 형제[자매]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회중은 무언가에 심하게 얻어맞은 표정이었습니다.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스티펙 목사는 조용한 목소리로 설교를 이어갑니다. "오늘 아침에 많은 교인들이 여기에 모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이 세상에 교인들은 많으나 제자들은 부족합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그는 자신의 설교를 이렇게 마무리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믿는다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이웃과 함께 그리고 이웃 옆에서 함께 사는 것입니다."

 

 

5. 25: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6. 우리의 마음과 집을 여는 것은, 우리와 그들을 함께 축복하는 것입니다.

Opening our hearts and homes blesses both us and oth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