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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의 일식체험

글쓴이 : 에드몬톤 안디옥 교회 날짜 : 2020-12-06 (일) 09:33 조회 : 931
설교일 : 12월 6일
설교자 : 한흥렬 목사
본문말씀 : 렘 Jer 20:14-18

예레미야의 일식체험 Jeremiah's eclipse experience

Jer 20: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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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과 회개의 강력한 말씀 선포자이자 용감무쌍한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자로써 주님을 경외하고 그와 동행한 선지자였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 20장을 읽게 되면 이 영적 거장도 끔찍한 ‘신앙의 일식현상을 경험’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늘은 '예레미야의 겟세마네'라고 불리는 그의 깊은 갈등을 담고 있는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예레미야가 말씀을 선포하다.

19장에 보면 항아리를 깨뜨리며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남 유다의 멸망을 선포합니다. 그는 또 다시 성전 뜰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선포합니다. 19:14-15 예레미야가 여호와께서 자기를 보내사 예언하게 하신 도벳에서 돌아와 여호와의 집 뜰에 서서 모든 백성에게 말하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 성읍에 대하여 선언한 모든 재앙을 이 성읍과 그 모든 촌락에 내리리니 이는 그들의 목을 곧게 하여 내 말을 듣지 아니함이라 하시니라. 남 유다도 바벨론의 침공을 받아 예루살렘은 파괴 될 것이고, 백성들은 수탈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저주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2. 바스훌의 모습에서 내가 보인다.

성전 총감독이었던 바스훌은 예레미야를 잡아 때리고, 매달아 모든 사람들 앞에 조롱거리가 되게 합니다. 두 가지 입장에서 본문을 이해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의 입장(예레미야)말씀을 받는 자의 입장(남 유다)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비록 그 말씀이 저주와 심판에 관한 메시지였음에도 말입니다. 축복의 말씀은 전하기 쉬어도 저주의 말씀은 전하기가 어렵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스훌처럼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잘 알면서도 조롱과 핍박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선포했던 예레미야는 참다운 진짜 선지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어쩌면 책망을 싫어하는 시대가 아닐까 싶습니다. ‘귀에 듣기 좋은 소리가 좋습니다. 듣기 싫은 메시지를 전하는 예레미야가 싫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살기 힘든 세상인데, 설교 말씀은 긍정적이고 희망을 주면 좋겠습니다. 사람의 기를 죽이고 우울하게 하는 메시지는 싫습니다. 이것이 당시 예루살렘 사람들과 바스훌의 생각입니다. 이런 바스훌의 모습에서 내가 보이고 우리가 보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저주와 심판의 의미는 회개하고 복을 받으라는 말씀 아닌가요? 7절에 보면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 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권유라는 단어는 파타(유혹,속임)이라는 뜻이고, 이기심이라는 단어는 야콜(이김)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유혹 받아, 하나님이 결국 이기셨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될 것을 뻔히 알았지만하나님께 결국 설득당해 하나님이 전하라고 하신 저주와 심판의 말씀이 전해졌으니 결국 하나님의 의도대로 되었다는 말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바스훌과 같은 우리가 이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우리가 듣고 싶은 것을 들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기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기면 우리가 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내가 이기면 망하는 인생이 됩니다.

 

 

3. 예레미야에게 신앙의 일식이 찾아오다.

하나님은 이기셨지만, 예레미야에게 신앙의 일식이 찾아왔습니다.

신앙인은 언제 일식체험을 하게 될까요?

 

첫째, 기대감들이 무너질 때입니다.

19:15 ... 이는 그들의 목을 곧게 하여 내 말을 듣지 아니함이라 하시니라. 20:2 이에 바스훌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베냐민 문 위층에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으로 채워 두었더니. 예레이먀는 저주와 심판의 말씀을 전하면 회개와 부흥이 임할 줄 기대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제사장겸 성전감독 바스훌처럼 기대했던 사람들은 말씀을 알아들을 줄 기대했던 겁니다. 예레미야의 절망은 변하지 않는 사람들의 완고한 죄에 대한 절망이었습니다. 또한 아무것도 이 백성을 위해서 할 수 없다는 절망, 회개케 하는 것도 내 능력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의 기대감은 실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둘째, 비난과 환란이 계속될 때입니다.

20:8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 20:10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이 두려워함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내 친한 벗도 다 내가 실족하기를 기다리며 그가 혹시 유혹을 받게 되면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어려움이 계속 될 때입니다.

 

셋째, 그러나 가장 힘든 것은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느낄 때입니다.

20:14-18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 나의 아버지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기를 당신이 득남하였다 하여 아버지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를 받았더면 / 그 사람은 여호와께서 무너뜨리시고 후회하지 아니하신 성읍 같이 되었더면, 그가 아침에는 부르짖는 소리, 낮에는 떠드는 소리를 듣게 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니 / 이는 그가 나를 태에서 죽이지 아니하셨으며 나의 어머니를 내 무덤이 되지 않게 하셨으며 그의 배가 부른 채로 항상 있지 않게 하신 까닭이로다 /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부끄러움으로 보내는고 하니라. 예레미야는 자신의 이런 깊은 절망에 빠져있음에도 하나님은 자신을 향해 아무 말씀도 하고 계시지 않는 다고 느끼며, 자신의 존재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자체를 원망하게 됩니다. 욥의 절망과 흡사합니다(3).

 

 

4. 하나님의 일식안에 해답이 숨어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 또한 하나님의 메시지라는 사실입니다.

기다림의 때이기도 하지만, 침묵 자체가 해답일 때가 있습니다.

회개치 않는 남유다를 심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그에게도 침묵하고 계셨던 것이죠.

ex) 왜 물어봐도 아무 말을 안해? 암씨롱 -

 

더 나아가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절망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유다를 향해 절망했던 것처럼 말이죠 ...

하나님을 떠난 완고한 남유다의 죄악에 더 이상 말씀이 없으셨던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일식안에는 하나님의 해답이 숨어 있습니다.

 

5. 마침내 하나님이 말씀하시다.

21:1a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여전히 말씀하시는 하나님,

여전히 거기에 계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식 가운데 우리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해야 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로고스의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것만이 하나님의 일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일식 가운데에도 하나님의 로고스로 삽니다.

 

 

<헌신과 결단>

대강절 둘째 주일입니다. 두 번째 촛불이 의미하는 것은 ‘베들레헴 캔들(육신으로 베들레헴에 나심)입니다. 첫 번째 촛불이 프라퍼시 캔들(이사야 예언의 말씀)인데, 이사야서의 말씀대로 예수님이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에서 나심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땅에 오심으로 그 계획이 성취되었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로부터 00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할렐루야!

 

일식 가운데 로고스 체험이 있기를 기도합시다.

내가 아닌 하나님이 이기시는 순종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결단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