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게시물 414건, 최근 0 건

길 위의 영성 Spirituality on the Road

글쓴이 : 에드몬톤 안디옥 교회 날짜 : 2021-04-18 (일) 06:21 조회 : 842
설교일 : 4월 18일
설교자 : 한흥렬 목사
본문말씀 : 눅 Lk 2:1-12

길 위의 영성 Spirituality on the Road

Lk 2:1-12

============================================================================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지난주 나눈 것처럼 우리는 '믿음의 길을 가는, 길 위의 신앙인'들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길 위의 신앙인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된 삶'이죠.

그래서 길 위의 신앙인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길 위의 영성'일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이며, 어떤 정신과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그것을 영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죠.

 

그렇다면 믿음의 길을 가는‘길 위의 신앙인들은 어떤 영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일까요?

 

1. 길 위의 영성의 토대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됩니다.

*토대는 그리스도의 출생

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요셉과 마리아 호적하러 나사렛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여관에도 거처가 없었음.

말 마구간에서 출생하여 구유 위 누위심 = 구세주 탄생.

길 위에 출생 = 세상의 눈으로 보면 비천하기 그지없는 초라한 출생.

하늘 보좌를 버리고 낮고 낮은 이 땅에 내려오신 메시야가?

 

*토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이것이 표적 = 길 위에 인생처럼, 주목받을 만한 모습없이 오셨지만,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는 삶을 사셨음. 세상으로부터는 버림받으셨지만, 그 세상을 구원하는 메시야가 되심. 메시야임에도 이름도 빛도 없이 낮은 곳에서 섬기시는 삶을 사셨음.

 

가이사 아구스도 로마황제의 세금징수 위한 호적명령, 일반역사를 사용하셔서 메시야 예언인 베들레헴에서 출생케 하신 것 즉, 어디서 태어났느냐가 하나님의 계획었다면, 어떻게 태어났는가 즉, 길 위에 태어나셨다는 것 또한 하나님의 계획을 말해주는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출생과 삶은 한마디로 길 위의 영성을 잘 보여주고 나타냅니다.

 

 

2. 그리스도인은 성공, 부귀, 영화의 삶으로 부르심이 아닌, 길 위에 삶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소위 세상 모든 사람이 열망하는 화려한 삶이 아니라, 화려하지 않은 삶.

세상 사람들은 올라가는 삶 아니라 ,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내려가는 삶.

 

세상 사람들과는 같은 길 같지만, 다른 길 = 두 갈래의 길

 

그러므로 선택부터 달라야 합니다.

왜 공부하느냐? 출세해서 유명해지고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남 주려고 남 살리려고 ...

돈 버는 목적? 부의 축적, 힘을 소유하기 위하여 ...

돈 버는 목적이 다르다면, 당연히 돈 쓰는 곳도 달라야? 그 힘을 자랑하고, 남을 지배하기 위한 일에 ...

 

 

3. 기독교는 본래 나그네들의 종교, '길 위의 신앙'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나그네였고, 모세가 나그네였으며, 엘리야도 나그네였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에 아예 나그네의 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철없이 그를 따르겠다고 나서던 어떤 젊은이에게 예수께서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머리 둘 곳조차 없는"(마태 8:20, 누가 9:58) 길손임을 일러주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회심한 바울은 일생동안 시리아로, 소아시아로, 그리스로, 그리고 로마로 떠돌이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의 모범을 보여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를 가리켜 '거리의 사람들'이라 불렀습니다. 그래서 청교도 시인 존 번연(John Bunyan)이 ‘천로역정’에서 크리스천의 생애를 나그네로, 순례자로, 그리고 이민자로 표현한 것은 당연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4.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바로 '나그네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특정 장소의 신이 아니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언제나 유랑하는 이스라엘 백성보다 한 발 앞서서 산으로, 들로 옮겨 다니시던 나그네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이후 가나안에 정착하고 난 후에 두고두고 겪은 시련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가나안 토착종교인 바알종교와의 대결이었습니다. '소유'를 뜻하는 '바알'이라는 이름의 신은 '텃세'의 신이었습니다. 특정 지역과 주민을 지배하는 '터줏대감' 신이었습니다. 때문에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야훼 하나님을 그와 같이 만들려고 했던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유혹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예언자들이 분연히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솔로몬이 거창한 성전을 세워 거기에 당신을 '모시려' 할 때에 달가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순례자의 하나님, 나그네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5. 따라서 우리는 모두 순례자로, 순례자라는 영성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순례자는 영어로 '필그림'(pilgrim)이라고 합니다. 이 말의 어원은 라틴어의 '페르 아그룸'(per agrum)인데, 그 뜻은 '들판을 가로질러'라는 뜻입니다. 이 말에서 우리는 어떤 성스런 목적을 갖고 대지를 걷는 나그네의 모습을 떠올릴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순례란 자동차에서 내리는 것입니다. 탈 것에서 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두 발로, 영혼의 나침반을 따라 '대지를 걷는 것'입니다. 걷되, '천천히 걷는 것'입니다.

 

스페인에는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라는 순례길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였던 '성 야고보의 순례길'입니다. 이 순례길은 과거에 예루살렘과 로마에 이어 유럽의 3대 순례지로 손꼽혔는데, 오늘날에는 이베리아(Iberia) 반도 끄트머리에 있는 '산티아고 데 꼼포스텔라 성당'까지 이어진, 수백에서 수천 킬로미터의 여러 다른 길들을 가리킵니다. 한국 사람들은 보통 프랑스의 생장(Saint Jean)에서 출발하여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북부지방을 걷는 약 800킬로미터의 여정을 가장 선호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부산에서 신의주까지의 먼 길인데, 다 걷는 데는 약 한 달의 기간이 걸립니다. 이 순례길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예전에 개봉한 영화를 한번 보시면 좋습니다. 배우 마틴 쉰(Martin Sheen)이 주연했는데,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조난당해 사망한 아들을 대신해 그 길을 완주하며 생전에 이해하지 못하고 다퉜던 아들을 이해하고, 또 잃어버린 자기 자신과도 만나 진실한 화해를 이루는, 한 아버지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 순례길을 다녀오신 분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순례길 곳곳에는 '알베르게'(Alberge)라고 하는 이름의 숙소들이 있다고 합니다. 거기에 가면 소박하지만 잠을 잘 수도 있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구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례자들은 처음에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들을 잔뜩 싸서 등에 지고 걷는다고 합니다. 나름대로 줄이고 줄여서 꼭 필요한 것들만 담는다고 했지만 어느새 가방은 묵직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몇 개의 알베르게를 거치면서 순례자들은 비로소 '버리는 법'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한 알베르게에서 다른 알베르게까지 오직 빵 두 쪽과 물 한 모금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비로소 버리고 비우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우리의 인생길 역시 그렇게 버리고 비우는 길임을 깨닫는다고 합니다.

 

 

움켜쥐려고만 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비우게 될까요?

길들여진 습관, 업적에 대한 도취, 소유에 대한 집착, 미래에 대한 불안입니까?

성공, 부귀, 영화, 화려함 입니까?

 

우리가 길 위의 영성을 가지고, 순례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면,

길 위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새 사람으로 다시 창조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