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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시는나사로 Nazarus Jesus loves

글쓴이 : 에드몬톤 안디옥 교회 날짜 : 2016-07-03 (일) 14:23 조회 : 2016
설교일 : 7월 3일
설교자 : 한흥렬 목사
본문말씀 : 요 11:1-16

사랑하시는 나사로 Nazarus Jesus loves

1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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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사 ‘당신 때문에 살맛납니다. ‘당신 때문에 살맛 안 납니다’ 이래서는 안되겠습니다.

 

2. 우리는 다 ‘예수님 때문에 살맛나는 인생’들입니다. 왜 그럴까요? 오늘 말씀속에서 해답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3. ! 오늘 본문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베다니에 살던 나사로가 죽었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죽은지 4일이나 지난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 같은 이야기죠. 이 이야기를 생각없이 보면 나사로라는 한사람을 살리신 이야기로만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나사로의 이야기를 깊이 보면 한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서 우리 인류전체의 이야기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4. 예수님께서 베다니 마을에 오셨습니다. ‘베다니’라는 이름은 ‘괴로움의 집, 혹은 고뇌자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사실 ‘괴로움의 집’임을 알 수 있습니다. 베다니가 가지고 있는 괴로움은 어떤 것들입니까? 본문이 잘 말해주고 있는데요.

 

첫째는 질병이 있는 곳입니다. 1절에 보면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세상 사람들 중에 어느 누구도 이러한 질병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습니다. 지구촌 어디에도 질병의 고통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 곧 ‘괴로움의 집,’ 베다니의 현실입니다.

 

둘째는 죽음이 있는 곳입니다. 14절에 보면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나사로라는 인간을 상징하는 그는 질병과 죽음의 문제를 극복할 수 없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어느 곳이든지 사람이 사는 곳에서는 죽음의 세력이 상존하고 있어서 사람들은 언제 밀어닥칠지 모르는 죽음의 불안을 안고 살아갑니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 키고르는 이러한 인간의 구제불능을 가리켜서 ‘죽음에 이르는 병, sickness unto death’라고 명명했습니다.

 

셋째는 슬픔과 눈물이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도착해보니 베다니의 마르다 집에서는 오빠 나사로의 죽음으로 인하여 슬픔과 눈물에 잠겨있었습니다. 19절에 많은 유대인이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다고 했구요. 33절에는 예수께서 마리아 자매와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비통히 여기셨고, 35절에는 예수님께서도 눈물을 흘리셨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죽음의 현장에는 슬픔이 있고, 눈물이 있습니다. 이것이 베다니의 실상입니다.

 

베다니 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다 질병과 죽음과 슬픔이라는 ‘고뇌자의 집’에 갇혀 살고 있습니다.

 

5. 그런데 그 베다니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구제불능 상태에 있던 인간 나사로를 질병과 죽음과 슬픔 가운데서 살려내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이틀을 더 예루살렘에 머무십니다. 바로 쫓아가서 고치시지 않았어요. 베다니에 도착했을 때는 죽은지 4일이나 되었습니다. 의도적이셨지요.


왜 그러셨을까요? 죽음의 문제는 그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불치의 병이지만 베다니를 찾아오신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생명으로 바꿀수 있는 분임을 증명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4절 말씀하시기를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다’ 하신 것입니다.

 

베다니로 찾아오신 예수님은 죄와 죽음에 억눌린 사람들을 일어나라고 명령하시는 분입니다. 오늘도 질병과 죽음과 슬픔의 베다니에 갇혀사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유일한 소망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는 줄 믿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베다니가 ‘고뇌자의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듯이, 나사로라는 이름은 ‘위로를 받은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사로의 이야기는 괴로운 세상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이지만 그 괴로움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이심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해 주시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베다니에 살고 있는 나사로들이다.

 

6. 하지만 마지막으로 남은 질문이 하나 더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왜 예수님이 베다니 같은 고뇌속에서 살아가는 나사로를 찾아오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사로를 찾아오셔서 죽음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3절에 그 해답이 있지요.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5절에도 보면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나사로는 인간을 대표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고, 여전히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사랑하시는 자를 살리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요 3:16-17“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나사로는 예수님의 사랑을 입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나사로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일을 했다고 그래서 그를 찾아왔다고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높은 윤리나 인격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얻을 자격이 있고, 사랑받을 자격을 갖춘 사람이 특별히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빈부귀천을 봐가면서 찾아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계춘할망이란 영화를 보니까 제주도 계춘할망이 부모 다 잃은 외로운 손녀를 끌어안고 아주 의미있는 멋진 말을 하더라구요. ‘예편은 남편 하나만 있으면 평생을 산다. 내가 네편 되어주꼬마. 내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시니까 찾아오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변함없이 나의 편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 주님은 인간 모두가 베다니에 갇혀 고통당하는 것을 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베다니의 짐을 우리를 사랑하셔서 찾아오신 예수님께 앞에 그냥 내려놓으십시오. 맡기십시오.

 

7. 이제 다음주부터 원주민선교가 시작됩니다. 원주민 또한 베다니에 갇혀살고 있는 나사로와 같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원주민 또한 질병과 마약, 알코올, 자살, 가난, 중독에 갇혀살고 있는 위로를 받아야 할 자들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유일한 소망이 예수님이듯이 저들에게도 유일한 소망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만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래도 사랑받을 자격이 있고, 저들은 문제만 일으키는 게으르고 무지한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나 저들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더 더욱 저들을 사랑하십니다. 베다니에 갇혀살던 나사로처럼, 원주민들은 지금 마약과 알코올 중독에 갇혀서 신음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사로가 죽어서 썩어서 악취가 나는 무덤속에 누워있었던 것처럼, 원주민들도 마약과 알콜중독으로 썩어서 악취가 나는 캄캄한 보호구역에 누워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향하여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하셨던 것처럼, 동일하게 원주민을 향하여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원주민들 아직도 소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원주민을 하나님이 여전히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뜻깊은 일에 기도로, 물질로, 도우미로, 주방팀으로, 선교대원으로 참여해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