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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옥합을 깬 이유 Why she broke a perfume jar

글쓴이 : 에드몬톤 안디옥 교회 날짜 : 2016-11-20 (일) 18:12 조회 : 2465
설교일 : 11월 20일
설교자 : 한흥렬 목사
본문말씀 : 눅 Lk 7:36-50

향유옥합을 깬 이유 Why she broke a perfume jar

Lk 7:36-50 / 찬양-주의 옷자락 만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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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우리 자신에게 던졌던 질문 가운데 아마도 자주 가졌던 질문이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는데 나는 왜 맹숭맹숭한 것일까?

나는 왜 기쁨으로 주님께 좀 더 헌신하지 못할까?

신앙생활 하면서 나는 왜 주님께 감사가 적을까?

 

오늘은 향유옥합을 깨뜨려 주님 발 앞에 부었던 한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합니다.

 

2. 어느날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초청받아 식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한 여인이 오더니 울며 눈물로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더니, 입맞추고 아주 비싼 향유를 부었습니다. 뜻밖의 일이었고, 지나친 행동이었기 때문에 모두가 당황하고 놀랐습니다. 가장 놀란 것은 집주인 시몬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놀란 것은 그 여인의 행동도 행동이지만, 예수님의 태도였습니다. 그 여인이 하는 행동을 보고도 예수님은 말리지도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주셨기 때문이죠. 예수님은 왜 그렇게 행동하셨을까요? 그리고 이 여인은 왜 비싼 향유까지 깨뜨리며 지나칠 정도로 주님께 부은 것일까요?

 

3. 그 해답을 우리는 40절 이하의 빚진자의 비유를 통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41-42절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예수님은 빚의 비유를 들어서 여인의 행동을 시몬에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오십 데나리온 빚진 사람과 이보다 열 배나 더 많은 오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이 똑같은 채권자로부터 빚을 탕감 받았다면 둘 중 누가 더 빚을 탕감해 준 채권자를 사랑하겠는가? 당연히 오백 데나리온 탕감받은 사람이라는 것이죠.

 

4. 이 비유에서 빚은 무엇인가요? 빚은 죄입니다.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는 전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죄에 대하여 각성한 죄인을 비유하는 것이고, 오십 데나리온 빚진 자는 자신의 죄를 인식할지는 몰라도 죄에 대하여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사람입니다. 자신은 저주를 받아 지옥에 갈 만큼 추악한 죄인이라는 각성을 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빚을 사하여 준 사람은 누구인가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인간이 되어 오셨고, 나의 죄 때문에 끔찍하고 비참하고 고통스럽고 저주스러운 십자가에 달리셔서 나대신 돌아가셨고 죄 사함의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십 데나리온 용서받은 죄인과 오백 데나리온 용서받은 죄인에게 예수님의 필요성은 하늘과 땅 차이가 납니다. 오십 데나리온 용서받은 죄인은 죄에 대하여 각성하지 않았기에, 자신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예수님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는 진정으로 자신의 죄짐을 지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반면 오백 데나리온 용서받은 죄인은 죄에 대하여 각성하였기에 죄 가운데 두려워 떨며 죄를 떨쳐버리려고 몸부림을 쳐보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경험하며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자신의 죄짐을 벗겨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십자가로 달려가게 됩니다. 죄를 사해주시는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알고 믿고 십자가를 붙드는 것입니다.

 

5. 그래서 47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향유를 부은 여인은 동네에서 다 아는 큰 죄인이었습니다. 누구도 이 여인을 가까이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여 주님께 과도한 헌신을 쏟아부었던 것입니다.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합니다. 그러나 큰 사함 받은 사람은 큰 사랑, 큰 헌신, 큰 감사도 아깝지 않습니다.

 

6. 내가 주님을 덜 사랑하는 이유? 헌신을 하지 못하는 이유?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 그 이유는 주님께 받은 사랑이 적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죄사함을 받은 경험이 없거나, 아니면 죄사함 받은 것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일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7. 17:11-17절을 보면 열명의 문둥병자가 주님께 치료받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중에 단 한명만이 주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립니다. 나머지 9명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그들은 왜 주님께 감사하지 않았을까요? 단서가 될만한 것은 9명은 유대인이었는데 돌아온 한명은 사마리아 이방인이었다고 기록합니다. 유대인과 달리 사마리아 이방인은 하나님의 백성도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을 자격조차도 없다고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은혜로 불치병, 죽음의 병, 문둥병을 고침 받은 것입니다. 그것도 유대인들과 동등하게 말이죠.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합니다. 그러나 큰 사함을 받은 자는 크게 사랑합니다.

 

8. 그러므로 죄를 각성하고 그리스도께로 달려와 죄 사함 받은 영혼은 반드시 주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은 필연적인 일입니다. 따라서 그의 온 마음은 주님을 사랑함으로 주님께로 향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믿음을 가지게 되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생각을 하게 되며, 그리스도 중심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함으로 주님께 헌신과 희생을 드리게 되는 것이죠.


여기에 이 여인이 이와 같은 행동을 한 이유가 있습니다. 다른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이 여인은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였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이 여인은 자신이 무가치하고 무능력한 죄인, 전적 타락하고 부패한 죄인, 마귀의 자식인 죄인, 저주받아 지옥에 가야 마땅한 죄인, 하나님을 대적한 죄인, 죄의 종노릇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처럼 죄에서 각성한 여인은 이 죄에서 자신을 건지실 구세주 그리스도를 붙들어서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이 여인에게 예수님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귀한 분이 되셨고, 세상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최고의 사랑의 대상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자신의 사랑을 그런 행동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9. 사랑은 인위적인 행동이 아니라 지극히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의 죄에 대하여 각성하지 않았기에 예수님을 자신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구세주로 믿지 못했고, 단지 랍비나 선지자 정도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경외와 사랑으로 예수님을 대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 사랑이 44-46절에 나오는 바리새인 시몬과 죄인인 여자의 행동을 이해하는 이유가 됩니다.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런 엄청난 차이가 생겼습니다.

 

47절에는 시몬과 여인의 행동을 결정짓는 원인을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죄에 대하여 각성하지 못한 채 그리스도께로 나아온 사람은 시몬과 같이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에 대하여 각성하고 그리스도께로 나아온 사람은 여인과 같이 그리스도를 사랑할 것입니다.


10. 우리에게 이 문제는 추상적이거나 이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실제적인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죄에 대하여 각성하게 되고, 죄를 사해 주시는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깨닫고 십자가를 붙들게 되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전까지는 경험하지 못했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을 경험하고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전까지는 그리스도 이외의 것들에 관심을 가졌다면, 이제는 그리스도께만 관심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하여 모든 것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오늘날 복음은 죄에 대하여 함구하고 죄를 희석해서 인간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인간의 비위와 기호와 취향을 맞추어서 더 많이 교회에 모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싸구려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복음을 전하는 자가 먼저 참된 복음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참된 회심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거듭남과 회심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고, 그러므로 거듭남과 회심을 일으키는 참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피상적으로 죄와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고, 인간의 행복과 탐욕을 채워주는 도구로 복음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는 인간의 수치스럽고 치욕스러운 죄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폴워셔는 ‘복음은 반감을 일으키는 사건’이라는 정의를 내립니다. 복음은 집요하게 인간의 죄를 폭로하고 드러냅니다. 그래서 복음은 인간의 행복과 안위와 욕구와 취향과 기호를 다 무너뜨리고 죄를 드러내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아가게 만듭니다.


11. 거듭나기 전까지 인간은 자신의 탐욕이 채워지는 것에서 행복을 느꼈는데, 거듭난 후에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에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여기에서 참된 헌신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향유를 붓는 행동이 우리의 예배와 찬양과 기도와 말씀 묵상과 설교와 전도와 선교와 친교와 헌금에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복음은 반드시 우리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리로까지 인도하며, 그 사랑이 이 여인과 같이 그리스도께 향유를 붓게 합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 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 7: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