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시리즈3 피하는 이유

에드몬톤 안디옥 교회 조회 : 373

문제시리즈하는 이유  Reason to avoid

Rut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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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1.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면 손쉬운 도피를 선택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엘리멜렉의 가정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1-2절 말씀을 보면, 사사시대를 살던 엘리멜렉도 살고 있는 고향인 유대땅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자 그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을 데리고 이방 땅인 모압을 찾아 갔습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그것이 충분히 기도한 후의 믿음의 선택이었다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겠지만, 이 가정의 경우는 그 근거를 찾아 보기 힘이 듭니다. 이 가정의 결정은 믿음에 의한 선택이 아니라 단순한 도에 가까웠습니다.

 

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2. 하는 이유들이 있습니다.

유대 땅 베들레헴에 든 흉년은 본문 6절과 비교해 볼때, 단순한 자연 재앙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땅에 살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불신앙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내려진 나님의 징계였습니다. 그 시대의 고난이 하나님의 징계 때문이라면 주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교훈을찾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회복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엘리멜렉의 가정은 도피를 선택했습니다.

 

이 가정이 도피를 선택한 원인이 무엇입니까? 이 가정이 도피를 선택한 이유'흉년입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또 다른 구체적인 원인들이 있습니다.

 

1) 육신의 문제를 우선시 했기 때문입니다.

이 가정은 당장 눈 앞에 닥친 육신의 문제 때문에 삶을 전체적으로 보아야 하는 안목을 잃어버렸습니다. 당장의 먹고 살 것이 없기 때문에 모압 땅으로의 이주를 결정했습니다. 이 가정은 눈에 보이는 것을 우선 선택했습니다.

 

이 가정은 '이 결정이 내 신앙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이 가정이 영의 문제 보다도 육신의 문제보다 중요한 자리를 할애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그리고이 가정의 가치관 속에는 언제나 삶의 전체를 내다보는 안목보다는 순간을 더 우선시하는 안목이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장 배가 고픈데 어떡합니까? 당장 사업이 안 되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러나 잃는 것이 있는가 하면, 얻는 것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물질적으로는 얻을 수 있을지 모르나, 영적으로는 잃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선택의 우선순위가 믿음에 있음을 절대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내 삶의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가정은 삶에 대한 전체적인 안목이 없었습니다. 순간만을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흉년이라고 해서 다 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2)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삶의 역경과 고난의 폭풍우 앞에 너무나 쉽게, 하나님 앞에 심각한 기도의 의논도 없이 모압행을 결심한 것입니다. 시편 50:15에 보면,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이 가정은 모압행을 결심하기 전에 주님께 먼저 부르짖었어야 했습니다.

 

<돌을 치우려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소년은 얼굴이 상기되고 땀으로 흠뻑 젖도록 돌을 움직이려 했으나 돌은 꿈적을 하지 않았습니다. 두번 세번 계속해서 있는 힘을 다해 돌을 잡아 당기지만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소년의 아버지는 "네가 최선을 다했느냐?"고 물었습니다. 소년은 ", 물론이죠."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너는 아직도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어... 왜냐하면 이 아비는 그 돌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었는데도 너는 나한테 도와달라는 말을 안했거든..." 우리는 종종 내가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을 하더라도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분명 우리의 최선 중 무엇이 빠진 것입니다. 소년이 행한 최선 중 빠져 있었던 것은「힘센 아버지를 의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을 의뢰하고 의지하는 것이 최선의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에도 주님은 계시고, 우리가 손을 내밀면 언제나 잡아 주십니다. 주님은 간절히 원하는 당신의 자녀들을 내버려 두시지 않고 하나 하나 거두십니다. 우리의 삶은 최선을 다하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엘리멜렉 가정은 하나님 보다도 지금 당장의 세상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믿었지만 이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은 삶의역경과 고난 속에서는 행동하실 수 없는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들의 생각과 믿음이 그 정도 밖에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믿고 있습니까?

 

오늘날 내가 삶의 현장에서 경험하고 있는 이 고통과 환란 속에서, 나를 훈련시켜 내 삶 속에 궁극적으로 그분의 놀라운 뜻을 이루어 내실 전능하신 주님으로 믿고 있습니까?

 

아비멜렉 가정은 세상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을 더 깊이 먼저 신뢰했어야 합니다.

 

3) 고난의 가치를 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시편 119:71에 보면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라는 시편 기자의 고백이 있습니다. 고난 속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있고, 고난을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주님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아비멜렉 가정은 고난의 가치를 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이 필요했습니다.

 

4) 욕심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이 가정은 약삭빠르게 경제적인 계산을 하고, 흉년의 고통스러운 시기를 피하여 잘 살려는 욕심이 앞섰던 것 같습니다.

 

<왕따 개구리>살고 습니다.

어느 연못에 유난히 치가 크고 성질이 고약한 개구리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연못에 있는 다른 곤충들을 사정없이 잡아먹고 같은 개구리들도 막무가내로 물어서 상처를 내는 바람에 그는 연못에서 '왕따 개구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놈은 자기에게 힘이 있어서 다른 개구리들이 피한다고 생각하고 그 기세가 날이 갈수록 더욱 등등해져 갔습니다. 이제 그는 연못에서 무서운 것이 없는 폭군이 되었습니다.

 

어느 여름 큰 홍수가 났습니다. 그 틈에 다른 연못에서 치가 세배쯤 큰 황소개구리가 떠내려왔습니다. 왕따 개구리는 이 커다란 녀석이 자기를 보고도 눈만 끔뻑이는 것을 보고 "이 녀석이.. 건방지게.." 하면서 있는 대로 입을 크게 벌려 황소개구리의 엉덩이를 물었습니다. 너무 입을 쫙 벌려서 무는 바람에 턱뼈가 부서지고 입이 엉덩이에 달라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입이 막히니 말도 못하고 입을 빼려고 아등바등 몸부림을 치다가 그만 제풀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걸 본 황소개구리가 뒤돌아보며 한마디 했습니다. "힘들면 놓지..."

 

오늘, 내가 욕심 사납게 물고 있는 것은 무엇인입니까?

 

성경은 야고보서 1:14-15의 말씀을 통해서 욕심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3. 하는 것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이 가정의 도피는 행복을 가져다 주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이 가정은 모압 땅에 머물며 살아온 10년 동안 가장인 엘리멜렉이 죽고, 이어서 두 아들 말론과 기룐도 죽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가정은 새로운 가장격인 나오미와 두 자부인 오르바와 룻... 모두 외로운 여인만 남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고통이 이 가정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말론'의 이름의 뜻은 <질병>입니다. '기룐'의 이름의 뜻은<상실>입니다. 여하튼 이 가정의 모압에서의 10년의 세월은 두 아들의 이름이 상징하는 것처럼<질병과 상실의 세월>이었습니다.

 

 

4. 문제해결은 피했던 자리로 다시 돌아올 때 시작됩니다.

이 가정은 계속 모압에 머물며 거기서 삶을 연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6절이하를 보면 결국 이 가정은 그들이 떠났던 베들레헴으로 다시 돌아오기로 결정합니다. 도피로 인해 일어난 문제의 치유책은 언제나 도피했던 그 자리로 돌아오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우리는 삶의 정황에서 공간적으로도 도피하지만, 때로는 심리적으로도 도피합니다. 그것이 공간적인 차원의 도피이건, 심리적인 차원의도피이건 우리는 돌아와야 합니다. '공간적인 돌아옴'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돌아옴'입니다.

 

인간이 선택하는 모든 도피 가운데 가장 두려운 도피는 '아버지 하나님을 떠나는 도피'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온 탕자가 그런 좋은 본보기입니다. 탕자는 결국 이 도피를 청산하기 위해 어떻게 하였습니까? 떠났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불신자가 하나님께 돌아오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유일한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잠시 낙심했던 성가 하나님께 돌아오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떠났던 자리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원위치입니다.

 

저는 이민자들에게 도전하고 싶습니다.

캐나다 사람십시오.  

밴쿠버 교회 / LA 교민들 중에는 한국만 왔다갔다하는 기러기 신자들이 많다고 합니다.

철새처럼 살지마십시오.

뿌리를 내리십시오. 왔다갔다하면 절대 뿌리를 깊이 내릴 수 없습니다.

물론 은퇴이후 노년이야 상황이 그럴수 있지만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의 자리를 지키십시오.

 

 

<헌신과 결단>

나는 주어진 고난이 하나님의 간섭인지 알면서도, 직면하기 보다는 도피해 본 적은 없습니까?

나는 주어진 삶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기 보다, 피하려고 했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습니까?

나는 '비록 지금은 어렵지' 주님께서 나를 위해 준비해 놓으신 풍족함이 주님 안에 있음을 믿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