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을 넘어서

에드몬톤 안디옥 교회 조회 : 361

갈등을 넘어서  Beyond Conflict

Ge 13:1-9  

==========================

안녕하세요. 서로 인사합니다. 뜨거운 날씨 속에서도, 하는 일마다 시원하게 풀리시길 기도합니다.

오늘은 좀 '위험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왜냐하면 자칫 이해가 부족하면 오해 될 수도 있는 부분이 있겠지만노회내 동성혼 대책 'Task Force' 팀장, 교단내 상임위원회 동성혼 대책 소그룹의 한 멤버로서 성도들이 바르게 이해들을 하고 계셔야 할 부분들도 있는 것 같아 조심스럽지만 겸하여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어느날 영국에 유명한 찰스 스펄젼 목사님에게 한 젊은이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목사님에게 갈등과 문제가 없는 교회를 좀 소개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 때에 목사님이 이 젊은이에 말하기를 “젊은이 만약 그런 교회를 찾거든 나에게도 좀 알려주게나” 했답니다. 그렇습니다. 죄인된 인간이 모인 어느 곳이든 갈등과 문제가없는 곳은 없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갈등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갈등을 잘 해결하는 것입니다. 오늘 믿음의 사람 아브람에게도 갈등이 발생합니다. 그 갈등은 멀리있는 다른 사람, 남남과 발생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 바로 가족안에서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조카 롯과의 갈등입니다그는 어떻게 이 갈등의 문제를 넘어 설 수 있었습니까?

 

1. 더 큰 그림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갈등이 발생하면 당장 눈 앞에 있는 것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문제에 집착하다 보면 문제속에 빠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큰 그림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람은 말합니다. 8 우리는 친족이라 그렇습니다. 아브람과 롯은 한 골육, 한 가족입니다. 이 순간에 내가 정말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재산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가족이었습니다. 가족은 돈으로도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재산이야 잃어버릴 수도 있지만 사랑하는 가족은 그 어떤 것으로도 만들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브람은 7에 보시면 더 큰 문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그렇습니다. 이방민족이 그들 곁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싸움한다면 무슨 덕이 되겠습니까

 

2003에 북한이 참석한 유니버시아드 대회가 대구에서 열렸습니다. 불미스럽게도 북한측 기자단과 남한측 보수단체간에 실랑이가 있었습니다. 그날 해외의 신문과 잡지들은 이 사건을 토픽으로 다루었습니다. 제목은 바로 “한반도에 과연 통일은 가능한가? 외국사람들에게 비친 남과북은 형제들이지만 싸움의 모습들을 보면서 회의적이고 냉소적인 반응들을 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더욱이 믿는 사람들끼리는 싸움을 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적인 방법들을 자행할 때 불신자들은 신앙인들을 비웃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을 조소합니다. 우리는 갈등이 있을 때에 더 큰 그림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2. 기득권을 포기해야 합니다.

갈등은 어떻게 해결될 수 있었습니까? 바로 아브람이 양보하였습니다. 갈등은 한 쪽에서 양보할 때 잠잠해 질 수 있습니다. 똑 같이 팽팽하면 결단코 싸움은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끊어질 수 있어도 해결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아브람은 모든 것이 롯 보다는 윗사람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롯이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었던 것도 알고보면 삼촌 아브람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양보를 해야 했다면 롯이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포기하고 롯에게 양보합니다. 결국은 좋은 땅은 잃었지만 평화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아브람은 먼저 롯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먼저 제안을 했습니다. 우리는 갈등이 생기면 “저 사람이 먼저 나에게 이렇게 하겠지”하고 상대방이 먼저 굽히고 들어오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찾아갔습니다. 아브람은 성숙한 사람이었습니다. 성숙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은 찾아가서 잘잘 못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내가 옳다고만 하면 그말은 상대방은 틀렸다는 것이 됩니다. 시시비비는 때로는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되지 못 합니다. 더큰 싸움으로 번지고 맙니다. 그럴 때는 한쪽이 기득권을 포기하고 양보하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됩니다.

 

심리학자 해리슨 이라는 사람이 쓴 책 가운데 유명한 I'm OK You're OK’ 라는 책이 있습니다. 나도 옳고 당신도 옳을 수가 있다. 이건 건강한 사람이예요. 또 나도 틀릴 수가 있고 당신도 틀릴 수가 있다. 이것도 건강한 사람이예요. 그런데 문제는 어떤 사람이냐 하면 I'm OK You're not OK. 나는 OK 인데 네가 틀렸다. 항상 자기가 정의예요. 자기가 정의의 잣대, 다른 사람은 항상 불의한 거예요.

 

'진정한 기독교'란 책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21세기 복음주의의 위대한 유산'이라 불리는 'John Stott'에게어느날 기자들이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사람인데, '성공회'에 계속해서 머물고 있습니까?’

 

 John Stott <분명히 틀린 것을 알았을 때, 취할 수 있는 3가지 방법>

1. 순응(Accommodation): 어쩔수 없으니 그냥 상황에 순응

2. 떠남(Departure): 탈출. 피함

3. 저항(Resist): 남아서 계속 싸움. 반대의 목소리

 

'누군가는 남아서 '아니오' 라고 외쳐야  할 것 아니냐? 잘못되었다고 해야 할 것 아니냐?'

 그가 성공회를 나왔다면 더 인기가 많았을 겁니다저항해야 하는게 맞죠.

참 그런데 그것은 외로운 겁니다. 좁은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스토트를 사람들은 '외로운 광야의 목소리' 부릅니다.

 

손해나 죽기를 각오하고 ...

구약의 참 선지자들, 세례요한, 예수님은 세속화된 믿음의 공동체,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요나를 잘 알지만요나는 처음에는 피해 도망갔지만, 결국 자기 민족을 공격하는 적국 니느웨에 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속에서; 일제의 신사참배 각교단 결정시 = 순응파 / 떠나서 피함 / 저항(순교)

오늘 우리는 누구를 더 존경합니까?

 

동성혼은 분명 비성경적입니다우리는 모두 반대합니다.

 그러나 떠나느냐 남느냐는 성경적이냐 비성경적이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떠날 수 있고, 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떠나는 분들은 이런 질문을 할 것입니다.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이상에 불과합니다. 앞으로 전도의 문도 닫히고 교회가 점차 쇠퇴할 텐데요...'

예 맞습니다. 그래서 나가는 것입니다그런데 그것을 알면서도 누군가는 남아서 계속해서 저항하는 광야의 목소리도 필요한 겁니다.

'참 바보 같은 짓입니다'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맞습니다. 바보 같은 행동일수 있습니다.

그런데 캐나다안에 있는 복음주의 교회들은 일단 대책을 의논할 총회를 준비하며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지금 우리는 누가 옳고 누가 틀린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3. 믿음으로 결단해야 합니다.

때로 갈등의 문제는 해결책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계속 문제해결하려 하면 결국은 상처투성이가 되고맙니다. 그럴 때는 잠시 싸움을 멈추고 여유를 가져보아야 합니다. 아브람은 한가지를 제안합니다. 우리가 싸울 것이 아니라 잠시동안만 떨어져서 생활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겠다. 그는 믿음을 가지고 결단을 합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한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믿음으로 결단할 때 하나님은 오히려 축복을 주시는 줄 믿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동성혼 문제는 비성경적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찬성하는 사람이 우리중에는 없습니다그러나 남느냐 떠나느냐하는 문제는 성경하고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남느냐 떠나느냐는 방법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비성경적일 때,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두가지 입니다떠나든지 남든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선택은 '그 사람의 혹은 교회의 믿음에 따라 각자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믿음에 따라 각자가 선택할 수 있지만책임은 선택한 사람에게 있다는 점과 중심 동기와 방법 또한 선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남는 사람들의 동기가 '건물과 재산' 때문만이라면 곤란합니다.

떠나는 사람들의 동기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날텐데하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만이라면 곤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경우라도 주님의 몸된 교회가 깨지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누구라도 교회를 깨뜨리는 말과 행동을 해서는 안됩니다.

특히 생각이 다른 두 그룹이 있을 때는 더욱 신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남는 사람도 떠나는 사람도 선한 동기와 방법을 가져야 합니다.

선한 동기가 무엇입니까? 사명 때문이어야 합니다.

남는 사람은 남아서 '복음의 사명, 소금의 사명' 을 끝까지 감당해야 하는 것이고,

떠나는 사람은 떠나서 '복음의 사명, 빛의 사명'을 끝까지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떠나는 사람들'끝까지 함께 남아서 저항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하고 남아있는 사람들을 격려해야하고, 남는 사람들'함께 나가서 힘을 보태주지 못해 죄송합니다' 하고 응원해야 합니다.

 

남든지 나가든지 둘 다 힘든 선택을 한 것입니다둘 다 복음주의 성도들입니다.

 

우리 교회는 노회와 복음주의 교회들과 힘을 합쳐서 싸울 수 있을 때까지 저항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궁금증을 가진 분들이 있을 겁니다.

목사님, 동성혼은 비성경적인데, 왜 우리 교단은 이런 결정을 하게 된 겁니까?’

여러가지 이유들이 많습니다. 그중에 한가지만 소개드립니다.

제가 그분들과 총회에서 이야기를 해보니까 우리에게 이런 한계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어떠한 죄인도 들어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재의 교회에는 들어올 수 없는 사람들이 소수 있습니다. 그분들 가운데 하나가 동성애 성향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들과 아예 상종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예수님도 이러한 문제로 핍박을 받았습니다. 당시 종교인들이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비난하면서 당신은 율법이 교제를 금하고 있는 죄인인 창기와 세리들과 어떻게 식사할 수 있습니까?’말했습니다2:16-17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바리생인들은 자신들이 거룩한 사람들이니까 죄인들과는 아예 상종을 하지 않았거든요. 오늘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다면 아마도 예수님은 동성애자들도 차별하지 않고 함께 식사 하셨을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의인을 구하러 온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분의 피값으로 세워진 교회는 마땅히 모든 종류의 죄인들을 품어야 하고, 그러한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안에 과연 그러한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는 분위기냐? 하는 겁니다. 더우기 동성애 이야기만 나오면 거품을 물고 성경을 인용하면서 거부하는데 말이죠. 지금 동성애를 반대해서 떠나는 사람들이 과연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그들을 끌어안고 교제하며, 그들을 혐오하거나 차별하지 않을 수 있느냐? 저는 물론 그럼에도 이러한 교단의 결정과 방법을 반대합니다. 분명히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성혼을 반대하는 소위, 극단적이고 전통적인 복음주의 안에도 이중적인 위선(말로는 죄인들도 사랑한다 하면서 실제로는 상대도 하지않는)과 그들을 가까이 할 수 없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음을 봅니다. 거듭 말하지만 물론 문을 여는 방법이 틀린 것을 압니다.

 

또한 저는 우리교단의 결정이 틀린 것은 분명하지만, 약간의 장점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동성애 문제는 양심의 자유에 따라 각자가 선택하라는 겁니다. 나는 동성애 못 받아들이겠다하면 거부하라는 겁니다.’ 교단을 떠난다고 해서 동성애 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주정부와 연방정부가 동성애를 법으로 시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희 교단법은 반대하든 찬성하든 다 허용하겠다는 겁니다. 양심의 자유에 따라 행동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저희는 교단법에 따라 숨어서가 아니라 떳떳하게 법적근거에 따라 동성혼을 양심의 자유에 따라 인정할 수 없습니다 말할 수 있는 겁니다.    

보세요. 앞으로 다가올 시대는 더 많은 심각한 문제들이 교회안에서 일어날 겁니다동성애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그럼 그 때마다 나갈 겁니까?무조건 떠나거나 피한다고 완전하게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추가적으로 기도제목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PCC안에 복음주의 연합모임 교회들의 유형들> 

1. Discern Group: 시대가 수상하니, 좀 더 시간을 갖고 신중히 분별을 기다리고 있는

2. Departure  Group: 떠남

3. Detach Group: 교단분립, 저희 노회, 그런데 2022년 총회에서 무산됨.

4. Stay'n Pray: 성령을 의지하고 회개하며 기도하며 저항하

 

소수민족 교회들이이야 PCC 교단에 대한 정이 많이 없지만,2-3대에 걸쳐 정이 든 목회하고 있는 분들과 교들은 쉽게 떠나기 어려운 요소들이 많습니다.우리가 섣불리 판단하고, 손까락질하며, 하나님의 뜻이니, 비성경적이니 하면서, 우리 안에서편협된 말과 행동을 해서는 안됩니다대신에 우리는 우리의 교단과 교회들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해 책임의식을 갖고 모두 자숙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헌신과 결단>

함께 잠시 기도하겠습니다큰 그림을 붙들겠습니다. 기득권을 내려놓겠습니다믿음으로 결단하고 이 시대에 주신 사명을 감당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