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절의 은혜, 갑절의 사명으로 3

에드몬톤 안디옥 교회 조회 : 238

갑절의 은혜, 갑절의 사명으로 3  

Double Grace, Double Mission

왕하 2Ki 2: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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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성읍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우리 주인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위치는 좋으나 물이 나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엘리사가 이르되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내게로 가져오라 하매 곧 가져온지라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에 던지며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부터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 하니

그 물이 엘리사가 한 말과 같이 고쳐져서 오늘에 이르렀더라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그가 길에서 올라갈 때에 작은 아이들이 성읍에서 나와 그를 조롱하여 이르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엘리사가 뒤로 돌이켜 그들을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곰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의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

엘리사가 거기서부터 갈멜 산으로 가고 거기서 사마리아로 돌아왔더라

 

 

우리는 지난 시간 2번에 걸쳐서 갑절의 은혜, 갑절의 사명에 대해서 2023년 우리교회에 주신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우리에게 갑절의 은혜를 주신 이유는 갑절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함이었으며, 갑절의 사명을 감당하려면 갑절의 능력이 필요함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오늘은 세번째 마지막 시간으로,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갑절의 능력을 주신 이유가 갑절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함이라면, 그 감당해야 할 사명은 어떤 것일까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지난 주 보았던 갑절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갑절의 능력을 구했던 엘리사의 그 뒷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질문 한가지를 드리겠습니다. 과연 엘리사는 갑절의 능력을 받았을까요?

 

 

1. 엘리사는 갑절의 능력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이 이를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는 백성들이 지켜보는 곳에서 자신이 엘리야의 대를 이은 선지자임을 입증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무명의 엘리사가 과연 엘리야의 후임이 될 수 있을지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무명의 사울이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으로 지명되었을 때, 사울 자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백성들도 사울이 왕의 자격이 있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암몬에게 침략당한 야베스 사람들에 대한 소식을 듣고 사울은 군대를 일으켜 암몬의 나하스 왕을 물리쳐버립니다(삼상 11:12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사울이 어찌 우리를 다스리겠느냐 한 자가 누구니이까 그들을 끌어내소서 우리가 죽이겠나이다). 다윗도 왕이 된 후에 제일 먼저, 400년 동안 정복할 수 없었던 오랜 숙원, 여부스 족속의 땅 예루살렘을 정복해 버립니다(삼하 5).

 

본문에서 엘리사는 엘리야의 승계 선지자가 되자마자 두가지 이적을 행합니다. 하나는 여리고 이적이고, 다른 하나는 벧엘의 이적입니다. 두 이적은 갑절의 능력이 엘리사에게 임했음을 의미함과 동시에 그 능력을 가지고 그가 앞으로 감당해야 할 두가지 사명, 혹은 사역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2. 첫번째 사명은 살리는 사역입니다.  

여리고는 수질이 좋지 않은 우물때문에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는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유산되는 일들도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엘리사에게 고쳐달라고 간청을 했고, 엘리사는 소금을 가져오라고 해서 물의 근원에 뿌려 좋은 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소금은 제사 재물을 드릴 때 사용하는데, 과거와의 단절을 상징합니다. 우물에 소금을 뿌렸다는 것은 과거에 쓴물을 생산하던 것을 멈추고, 이제부터는 생수를 생산하게 될 것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우물을 회복하는 것은 과거에 모세가 마라의 쓴물을 달게 한 일을 연상케 합니다.

 

엘리사가 여리고의 물을 치료하는 것은 큰 상징성을 지닙니다. 가나안 땅을 여호수아가 정복하러 들어올 때에 요단 강을 가르고 건너왔던 것처럼, 엘리사도 요단강을 가르고 건너왔습니다. 엘리사는 새 여호수아로서 여리고성에 입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 여호수아가 선포한 여리고성에 대한 저주를 새 여호수아인 엘리사가 거두고 대신 생명을 축복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던 여리고 성이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복되어야 할 것을 선포한 것입니다.

 

21-22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에 던지며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부터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 하니 그 물이 엘리사가 한 말과 같이 고쳐져서 오늘에 이르렀더라

 

엘리사는 요술장이가 아닙니다.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입니다. 엘리사는 자신의 능력이나 요술로 물을 고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인 말씀으로 고친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사명을 수행하는 사역방법인 것입니다. 그가 선지자로서 세움받고 감당한 첫 사역은 생명사역, 살리는 사역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감당해야 최우선적인 사역은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교회는 생명을 살리는 곳입니다. 그래서 죽어가던 사람도 교회에 들어오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열매 없고 소망없는 인생도, 다시 소망이 생기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쓸 모 없는 인생도 쓸 모 있는 유익한 인생이 됩니다. 쓴 물 인생이 단 물 인생으로 변화됩니다. 살인자 사울은 예수님 만나고 생명을 살리는 전도자 바울이 되었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이러한 살아난 사람들의 간증으로 넘쳐나야 합니다. 새롭게 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회자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가장 왕성해야 할 사역은 생명사역이기 때문입니다.

 

 

3. 두번째 사명은 죽이는 사역입니다.

여리고를 나온 엘리사는 벧엘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성에서 나온 아이들이 대머리여 올라가라조롱합니다. 엘리사가 저주했더니 암곰 둘이 나와 42명을 해코지 합니다. 철없는 아이들이 놀렸기로서니 저주하는 선지자는 무엇이며, 더구나 42명의 목숨을 빼앗아가는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하나님이란 말입니까? 그래서 해석하기가 난해한 사건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지난 시간에 보았던 벧엘이란 도시에 대해서 알면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었고, 이스라엘 종교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금송아지를, 나중에는 바알신을 섬기는 사악한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배교의 중심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지금 그 벧엘로 하나님의 선지자가 올라갑니다. 그러니 그 도시 사람들은 하나님을 전하는 선지자가 오는 것이 반가울리가 없습니다. 아이들이 나와서 대머리 선지자여! 꺼져버려라! 엘리야 처럼 없어져라! 아이들 조차도 하나님을 모욕할 정도로 타락한 벧엘의 배역을 빗대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하나님을 조롱하는 이스라엘을 전체를 상징합니다. 이것은 엘리사를 조롱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조롱하는 행위입니다.

 

엘리사는 배교한 사악한 죄에 빠져있는 선지자를 핍박하는 벧엘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선포합니다. 회개를 촉구합니다. 이것이 바로 선지자로 세움받고 두번째 감당한 회개와 심판사역, 죄를 죽이는 사역입니다.

 

24 엘리사가 뒤로 돌이켜 그들을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교회는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해야 합니다. 잘 못된 것을 분명하게 경고해야 합니다. 피하면 안됩니다. 피하면 결국 벧엘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지만, 심판의 하나님이시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적국 니느웨가 미웠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서 심판을 선포하여 그들을 돌이키라고 사명을 주셨지만, 그는 사명을 버리고 다시스로 피해서 도망갑니다. 결국 풍랑을 만나게 되고, 회개하고 돌이켜 타락한 니느웨로 결국 갑니다. 외칩니다. 그런데 그곳이 회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회개와 심판의 사역입니다. 죄에서 떠나도록, 죄를 죽이는 사역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듯 싶습니다. 사랑만 외치는 교회로 가득합니다.

우리끼리만 좋으면 문제될 것이 없다는 식입니다. 그러기에 죄인들을 향하여 나아가지 않습니다.

 

아이가 잘 못 되가는 것을 보고서도 야단치지 안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 아이를 사랑한다면 때론 책망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용서의 사역도 필요하지만, 때론 회개의 사역, 권징의 사역도 필요한 것입니다.

성도들이 듣기 좋아하는 설교만 아니라, 듣기 싫어하는 쓴 소리도 해야 합니다.

강단이 그러한 부분에 균형을 잃으면, 그 교회의 영성은 죽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살리시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십니다. 복을 주시고하고, 화를 내리시기도 합니다.

생명과 죽음은 오늘도 우리 앞에 놓여있는 선택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비를 내리십니다. 차별이 없습니다.

둘 다에게 기회를 공평하게 주십니다. 그런데 선택은 나의 몫입니다.

선인은 듣고 돌이킨 사람입니다. 그래서 복을 받습니다.

악인은 듣고도 돌이키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주를 받습니다.

우리는 듣던 안듣던, 좌로나 우로나 치우지지 말고, 죄를 죽이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4. 그러므로 두 사역은 모든 교회가 감당해야 할 본질적인 사명입니다.

우리는 갑절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갑절의 사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명을 감당할 때 갑절의 능력도 받습니다.

 

그 선한 갑절의 능력으로 :

살리는 사명, 생명을 살리는 사역, 회복과 사랑과 전도와 선교의 사역을 감당합시다.

죽이는 사명, 죄를 죽이고, 죄와 맞서 싸우는 사역, 회개와 심판과 정의와 공의의 공정의 사역을 감당합시다.  

 

엘리사는 담대하게 갈멜산으로, 그리고 사마리아로 나아갑니다.

스승 엘리사가 바알 제사장들과 싸웠던 곳이고, 아직 악한 아합의 아내 이세벨과 그 아들이 통치하는 곳입니다. 계속해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입니다.

 

25 엘리사가 거기서부터 갈멜 산으로 가고 거기서 사마리아로 돌아왔더라.

 

선한능력으로 영광의 그날을 향하여, 계속해서 전진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기도합니다.

 

 

<헌신과 결단의 찬양>

선한 능력으로 다같이 찬양 부른후 기도하겠습니다.

 

주 선한 능력으로 안으시네  그 크신 팔로 날 붙드시네

절망 속에도 흔들리지 않고  사랑하는 주 얼굴 구하리

 

//: 선한 능력으로 일어서리  주만 의지하리 믿음으로

우리 고대하네 주 오실 그 날  영광(승리)의 새날을 맞이하리

 

이전의 괴로움 날 에워싸고  고난의 길을 걷는다 해도

주님께 모두 맡긴 우리 영혼  끝내 승리의 날을 맞으리

 

주님이 마신 고난의 쓴 잔을  우리도 감사하며 받으리

주님의 남은 고난 채워가며  예수와 복음 위해 살리라

 

 

< 봉  헌 >  https://youtu.be/6PKrN-bGt6k

다같이 영상따라 찬양하며 봉헌하겠습니다.